Alley for Oshud's
by osh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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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하겠다는 사람들..
전쟁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살과 뼈를 총탄이 찢고 들어올 때에야

그 사실을 깨닫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비극이다.

이제라도 전쟁하면 어떠냐는 이들..

자신의 가족과 몸뚱이를 걸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정녕 모른다는 말인가...쯔쯔.


.
by oshud | 2010/05/24 21:37 | Mind | 트랙백 | 덧글(0)
구슬꿰기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부뚜막의 소금을 소금이라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의 희미한 발자욱을 발견한 다음 부터다. 그 방법을 아는데, 30년이 걸렸다면, 다시 그 방법을 옆사람에게 전하는데 30년, 다시 또 그 옆사람에게 전하는데 30년...과연 그 생각은 사람들의 두뇌속을 전전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은 생존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지식 네트워크속에는 사멸된 생각들이 많을 것이다. 설마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뇌로부터 지금까지 인간, 또는 인간의 선조들의 두뇌에 나타났던 생각들이 모두가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생각, 일종의 답이될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만, 그  관문을 간신히 헤쳐서 지금 거기에 서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이제부터가 진짜 어려운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육체가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생각의 생존과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이 답이라고 한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된다. 아니,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얼마 안된다. 듣는다 하더라도 곧 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맞는 답이 아니라고 대꾸해 주는 사람도 얼마 안된다. 소통이란 이렇게 답답하고 느리고, 우습다. 우리중 누군가에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정답이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전달될 확률은 얼마일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듯 암흑의 무지속을 헤메이고 있다. 저마다의 발등을 아프게 내리치면서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 양 계속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정답을 찾고 싶은가? 정답을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이 정답은 아닐까? 우리중 누군가의 거대한 정답이 살아 내게 오도록 하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생존할 수 없는 정답은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바로 우리다.
by oshud | 2009/08/02 21:35 | Mind | 트랙백 | 덧글(0)
쉬운 음악, 어려운 음악

예전에는 오락실이라는게 상당히 인기였다. 지금은 오락실 하면 폐인이 다 된 아저씨들이 담배연기 자욱한 곳에 몰려앉아 무슨 무슨 이야기나 하시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내가 어릴적만 해도, 오락실은 웬만한 테마파크 이상의 즐거움을 주던 곳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가서 무슨 게임을 하고 있으면 오락실 죽돌이(상근자?)들이 접근해서 원치 않는 코치를 해주곤 했다. 영화로 치면 일종의 스포일러 같은 내용을 알려주며, 제대로 적들에게 대처를 못해 죽기라도 하면 혀까지 차며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 보곤 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최후의 대왕(?)을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는 이들은 인생 부적격자라도 되는 듯 덜떨어진 인생이라는 듯 쳐다보곤 하는데, 난 무언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못하는 입장에서 말한마디 대거리도 제대로 못하고 식식거리며 다신 안올 것 같은 걸음걸이로 오락실을 뛰쳐나오고는 했다. 얼마 못가서 다시 오락실로 달려가기는 했지만..

나이깨나 먹은 후에 한 피아노 학원에서 소나티네의 한 구절을 피아노로 치고 있을 때 한 꼬맹이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면서, '나는 그거 잘 치는데' 하고 도망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잘친다는 표현을 사람들이 쓸 때는 어떤 기준으로 쓰는가? 세계 최고가 아닌다음에야, 사실 나 잘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기는 할 것이지만, 꼬맹이야 어린 기분에 명랑하게 그러고 다닌다지만, 성인들이 되어서도 그런다면 참 우스울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두가지의 함정에 빠져있다. 일단 쉬운 음악은 우습게 생각한다. 그리고 '진도'를 나간 다음에는 이전의 곡들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하의 모테트나, 번스타인의 '치체스터 삼' 정도를 연주해본 사람들은 '고향의 봄' 정도는 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바이엘'을 아름답게 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쉬운 음악이란 없다. 기술적으로 시간을 나누어 음표를 날릴 줄 안다고 해서 좋은 연주는 아닐 것이다. 숨가쁘게 이어지는 속주로 음악적 감성을 숨길 수는 없다. 물론 기본적인 기량이 안되어 올라설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우리는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급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산을 오를 것인가에 대한 자세와, 경로가 더 소중한 것이다. 자기만의 고향의 봄, 자기 스타일의 바이엘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상상한다면, 내가 너무 극단적인 것일까?

또, 어려운 음악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음악을 연주해야 '폼'이 난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음악이란 무엇일까? 유난히도 손가락이 길고 손이 컸다는 리스트의 곡을 자유자재로 타건하고, 쉔베르크의 무조성음악을 틀림없이 연주하는 연주자는 정말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음악가는 기술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C난도,  D난도를 들먹이며, 어려운 음악이라고 평하는 건 문제가 있다.  동요'나비야'를 연주해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쉽다 어렵다로 흔히 들먹이는 기술적인 어려움은 사실 음악에서의 어려움 중에서도 '쉬운' 어려움이다. 감동적인 대가 연주자들은 정말 기술적 완성도로 우리를 압도하는 것일까?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더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더 깊은 것을 건드리는 연주는 어렵다. 최근 연주자들은 기술적 불완전성 못지 않게,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 쉬운 음악은 없다는 자세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자신들은 '쉽다'고 생각하며 연주하는 곡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작 '어려운' 음악이 안되는 것은 아닌지. 정말 어려운 음악은 오히려 '쉬운' 음악은 아닌지.

바하에게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작곡을 하실 수가 있나요?'
바하는 대답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만큼 공부를 한사람은 누구나 이정도 작곡을 할 수 있습니다."

by oshud | 2008/09/15 17:36 | Music | 트랙백 | 덧글(1)
행복하지 않은 사회

노르웨이 오슬로에 갔을 때 도시의 근교에 너른 잔디밭이 글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던 것이 생각난다. 미국이라면 축구장, 아니면 야구장 이런 식으로 레이블을 붙이고 구획을 하고 금이라도 그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파트 아니면 연립주택을 열 동은 세우고 팔아먹을 수 있는 땅을, 그것도 전차가 서는 정거장 주변의 땅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사는 사람들을 막상 보니 놀라웠다. 이 곳이 시골이 아니라 오슬로시 내부라는 것이 놀랍지 않은지. 우리네 사람들의 눈으로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비효율적인' 사람들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노르웨이라는 혹독한 자연환경에 노출되어 살아온 사람들이 우리보다 '조리'가 부족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닐터. 그 땅을 이리저리 개발하면 톡톡히 한 몫 잡을 수 있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 땅은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고, 대충 놓여진 골대들 사이로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각자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이런 공간 바로 옆에는 연립주택들이 배치되어 있다. 연립주택은 조그마 하지만, 난 10억에 육박하는 서울의 50평 아파트에 사는 것 보다 이런 공간에 살고 싶다. 서울은 토지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안된다고? 오슬로는 맥도날도 빅맥세트 하나에 2만원이다. 버스나 트램을 한번 타려면 5천원 짜리 티켓을 끊어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의 대도시에서 온 이들도 이곳의 물가는 살인적이라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오슬로에서 만난 대학교수는 물가가 비싸 외식은 꿈도 꾸지 못하고, 보통 걸어서 출퇴근한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서울에 이런 공간을 만들고, 보듬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지가가 상대적으로 싼 우리나라의 지방도시에는 이런 공간이 유지, 관리되고 있는가? 여기엔 '시장', 또는 '가격'이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치환될 수 없는 '사회적 결정'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작동에 따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지, 우리에게 이러한 공간 자체를 구성할 공간과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하며, 억울한 사람이 없는 방식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요소들이 어울려 굴러가는 현상 속에서 몇 가지 요소, 예를 들면, 돈, 자본, 시장의 작동과 같은 몇 개의 개념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너무도 단순하게 바라보는 편협한 모델속에 우리의 사고를 가두는 것은 아닐까? 아침에 일어나면, 맑은 공기를 마시고, 차에 치일 걱정이 없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오후엔 한가로이 산책도 하고, 저녁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는 그런 삶은 우리의 기술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일까? 분명 1,000년 전의 사람들보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앞선 기술을 가지고 더 긴 시간 일하고 있지 않은지? 공간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모두 닥닥 긁어다 돈되는 공간으로 바꾸지 못해 안달인 지금, 우린 무엇이 문제일까. 난 오슬로의 시민보다 무력하고 무능하고, 부족한 것일까.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간이라서 그러한가? 

내가 원하는 소박한 사회, 소박한 공간은 나에게 너무도 '비싼' 재화란 말인가? 누구나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기 때문에 비싸지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얻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작금의 구조는 뭔가 행복하지 않다. 난 우리가 부족하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 이모양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습다. 우리의 문제는 열심히라기 보다는 어떻게가 아닌가 말이다.
 
by oshud | 2008/08/29 10:27 | Urbanism | 트랙백 | 덧글(1)
음악과 숫자.

숫자없이 음악을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음계와 화성, 대위 등등은 숫자에 기반하여 조직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단선율의 시대를 지나, 최초의 병행8도 오르가눔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인간의 음악은 사실 숫자를 떠나서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 화성학을 공부할 때, 숙제를 붙잡고 끙끙대던 시절, 악보만 보면 숫자들이 떠올라 머리가 딱딱 아프기도 했다. 숫자란 추상이다. 우리가 으뜸음을 기준으로 옥타브를 잡고, 그 사이를 11개로 균등하게 나누어 무한한 음고 중 일부만을 골라 쓰는 현재 서양음악의 시스템은 간단 명료한 반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순정율과 평균율에 대한 논의도 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숫자놀음에 익숙하지 않으면, 음악을 분석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단순한 동요를 들을 때도 이게 몇도 화성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음악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음악 공부는 숫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병행이나 은복 따위를 피해서 화성음을 배치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해도, 실제로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귀와 숫자가 연결이 되어야 한다. 감성적 반응과 추상적 숫자가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화성의 배치가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판단과, 선택이 필요하다. 이는 경험없이는 구축할 수 없는 지식이다.

우리가 음악을 듣다보면, 어색하다고 느끼는 경우, 사실 그 구성음의 논리적 구성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러한 음들의 배치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경험치의 누적이 부족한 경우, 우리는 어색함을 느낀다. 아직 그 화성을 쓸 입장이 안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화성의 집단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생각하는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간다. 이는 의식적인 활동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취향과 선택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누가 더 월등한가는 음악적 재능에 달려있지만, 그러한 취사선택에 들인 시간과 노력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동일한 화성진행이라도 김광민이 연주하면 많은 악기 속에 언뜻 들어가 있더라도 단번에 티가 난다. 그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김광민을 다른 작곡가들로 부터 구별시켜주는 배치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가두는 억압의 배치이기도 한다. 그는 시간속에서 선택을 통해 자신의 패턴을 만들었으며, 스스로의 분신이 된 음의 배치가 생성되어 있지만, 그 배치는 다시 스스로를 억압한다. 그 억압을 벗어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또 다른 도전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같은 초보로서는 그런 스타일을 창조한 것 만으로도 너무나 존경스럽지만, 그 너머로 나아가야만 하는 예술가의 도로는 사실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여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경험과 숫자를 연결해야만 하는 것은 음악적 활동의 기본이라 생각되지만, 그 연결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선택을 누적적으로 수행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패턴을 만들어가는가, 그리고 그 독창성의 가치가 인정되는가 하는 점은 음악적 재능과, 노력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이는 사실 공간의 설계에서도 비슷한 관계를 가진다. 공간의 크기 등에 대한 숫자와 공간적 경험을 연결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면서, 그런 관계들을 어떻게 연결짓고, 누적적으로 선택하여 공간적 패턴을 구성해 가는가 하는 것은 음악적 활동과 상당히 유사하다. 추상적 숫자와, 자신의 육체를 연결하는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학술활동과는 어느 정도 다른 것 같다.

숫자도 결국 하나의 모델링의 산물이다. 화성법의 체계나 기존의 건축언어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복잡다단하고 무한히 연속된 불확정적인 현상을 일정한 모델로 그물망을 쳐 건져올리려고 한다. 무한한 주파수를 화성법이라는 그물로 건져서 사용하는 서양음악의 체계와, 모듈을 중심으로 무한히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분절하는 설계방법은 이러한 점에서 동형성을 가진다. 전문가라면, 이러한 추상과 현실의 누적적 연결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결과로 구성된 패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그러한 패턴의 효과에 대한 반성과, 패턴이 폐기되어야 하는 지점에 대한 고백이 필요하다.

음악은 숫자로 시작되지만, 숫자를 버릴 수 있는 지점에서 인간을 만난다.

by oshud | 2008/08/27 21:51 | Music | 트랙백 | 덧글(0)
맥락에 대한 소고

진정한 소통은 허구일뿐, 아무 것도 있는 그대로 전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전하고자 하는 내용 조차 실재하지 않고, 무언가 실재하는 것 같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지 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어쩌면 무의미하게 나열된 어휘들도 톨스토이의 저작과 별 차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알 수 없는 어휘만 나열하는 사람을 얼마나 참아내고 상대할 수 있을까?


재미없는 영화들은 플롯이 없다. 이야기의 전개구조에 연관성이 없는 것이다. A라는 장면 다음에 B라는 장면이 왜 나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영화들은 아무리 현란하고 아름다운 화면이 나오더라도 재미없다. 아름다운 화면만으로 긴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A와 B사이의 무관함으로 낯설게 하는 효과를 '의도'한 것이라면 모르겠으되, 그 의도조차도 사실은 연관성을 바탕에 둔 '낯설음'이라는 점에서 맥락은 지속되어 있다. 얼치기 작가들은 그러한 의도되고 계산된 '낯설음'과 연관성과 설득력이 부족한 무리한 연결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장편이 어려운 것일게다.

한편의 책을 읽을 때, 전공서적이나 소설이나 맥락없는 글을 읽는 것은 피곤하다. 결국 작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또한 의도한 장치라면 수긍해야 할 것이지만, 나의 지적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글들이 너무나 차고 넘친다. 하나의 문장 다음에 왜 그 문장이 오는지, 하나의 문단 다음에 왜 이 문단이 오는지, 하나의 장 다음에 왜 이 장이 오는지 알 수 없는 글들이 많은 것이다.

글이 유기체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맥락없는 구성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희화시킨다. 그런 글들은 소통을 막는 "반글"이다. '소통'기계가 아니라 '단절'기계인 셈이다. '단절'기계는 누군가에게는 '밥그릇'기계인지도..

반글도 예술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고는 하지만, 학술적인 글들에서 조차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미 해체주의의 나라이기 때문일까? 해체가 권력을 해체하는게 아니라, 권력을 구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우리주변에 넘쳐나는 맥락없는 글들은 나를 피곤하게 하는 어이없는 호러쇼다.


by oshud | 2008/08/01 10:50 | Urbanism | 트랙백 | 덧글(0)
고유가와 도시개발

요새 우리나라에서 많이 회자되는 도시로 두바이가 있다.
사막 한가운데 무언가 요란한 것을 건설하여, 그럴싸 하게 보이는 도시. 두바이.
많은 시장이나 잘 나가는 사람들이 도시개발을 이야기할때, 모범적인 예로 들고는 한다.

 Dubai Photos - Dubai Aerial Shots from Helicopter (c) DubaiForLife.comDubai Photos - Dubai Aerial Shots from Helicopter (c) DubaiForLife.com

사막에 건설되는 도시. 두바이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중동의 석유 보유고가 바닥나도 두바이는 버틸 수 있을까?

유가가 200불을 넘어서서도 자동차 중심의 도시환경이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신도시나 신시가지는 자동차가 없는 환경을 상상하기 어려운 스케일이다. 평촌의 경우에도 보행자 네트워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가로의 스케일이 결코 보행친화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거대한 매스와 자동차가 질주하는 넓은 도로변의 보행공간은 결코 선호되기 어려운 보행환경이라 하겠다.

현재 설계되고 지어지고 있는 도시공간은 보행을 위한 공간이 물리적으로는 확보되어 있지만 실제로 보행에 적합한 공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갈수록 차량의 이용을 최대화시키는 공간구조라 하겠다.

여기에 우후죽순처럼 지어야만 한다고 주장되는 초고층 건축물. 안그래도 우리나라의 모든 주거양식은 고층 아파트로 몰리는 상황에서, 초고층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고 다들 주장하고 있다. 

초고층 아파트에 꼭 필요한 가압급수시설, 고속엘리베이터, 공조시설 등은 강력한 에너지 소비기계다. 팔리기 때문에 짓는다는 것이 짓자는 측의 주장이다. 앞으로 에너지의 가격이 급등하게 되면 그러한 이유도 곧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대규모 필지체계와 광로로 이루어진 가로체계가 필요하다. 대규모 필지체계와 광로체계는 다시 자동차 이용을 부추기게 된다. 그로 인해 다시 보행자 위주의 공간구성은 곤란하게 된다.

결국 고유가에 대응하는 공간구조는 걸어서 올라다닐 수 있는 저층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리적, 심리적으로 보행자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도시구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이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도시공간은 초고층의 광로체계로 변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현재 돈이되고 그럴싸해보일지라도,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가 있다면, 심각하게 같이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도시개발 방식은 언제나 보행을 말하지만, 아파트 단지와 초고층주상복합을 끼고 가는 대규모 광로체계를 고집하는 한, 고유가시대를 대비하는 공간은 결코 될 수 없다.

최근 고유가로 인해 자동차로 도심출퇴근을 하던 신도시인구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벌여놓은 부적절한 공간구조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by oshud | 2008/06/17 13:53 | Urbanis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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